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니지 전투 (문단 편집) === 전개 ===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마레트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작전은 제15 기갑사단의 반격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10군단이 롬멜이 우려했던대로 측면으로 우회해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방어선은 붕괴되기 시작한다. 결국 추축군은 북서쪽으로 60km를 후퇴하고 가베스 부근의 와디 아카리트에 새 방어선을 만들게 된다. 미 2군단도 협곡을 통해 추축군 방어선 후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미군이 이기는 상황이었지만 지형[* 이 때문에 가베스 주변 고지의 이탈리아군을 소탕하는데도 몇 주가 소모되었다.] 때문에 미군은 독일군을 추적하는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영국군 8군과 미군 2군단의 계속된 공격으로 방어선은 다시 붕괴되고 추축군은 다시 북쪽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와중에도 이탈리아 해병은 영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독일의 후퇴 이후 영국군과 미군의 전선이 연결되면서 다시 소모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 연합군 공군은 추축군의 공수작전을 차단하는 데 집중했고 영국 군함들 역시 보급선과 탈출로 차단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독일군의 상황은 더 악화되어간다.] 이 때부터 아프리카 집단군의 패배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미 2군단과 영국 1군과 8군이 포위해오고 있는 상황에서 독일군은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10 전차사단의 지원을 받은 괴링 사단이 8km 가량 침투했지만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다시 방어선으로 돌아와야 했다.] 남쪽부터 시작된 연합군의 공세에 독일군은 다른 방어선의 대전차포와 예비 전차 전력을 돌려 막아낸다. 하지만 이로 인해 중앙의 전차 병력에 구멍이 생겼고 이 때문에 미 2군단과 5군단의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방어 거점 대부분을 점렴당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 공세인 엔피다빌 방면의 연합국 공격은 추축국의 강력한 방어선과 험난한 지형 때문에 당시의 병력으로는 성공이 불가능했다. 알렉산더는 몽고메리에게 수비 임무를 밑기고는 병력을 증강해 주변으로 집결시킨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의 병력 규모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5월 5일 연합국의 모든 준비는 끝난 상황이었다. 결국 대대적인 포격 지원을 받은 연합군의 보병은 추축군 방어선을 돌파했고 6, 7기갑사단이 밀고 들어가게 된다. 5월 7일, 영국군 전차가 튀니스로 입성하게 되고 북쪽의 비제르테는 2군단에 의해 함락되었다. 결국 6일 후 230,000명에 달하는 추축군[* 이 병력들은 시칠리아 방어전을 담당할 군사들이었다.]이 연합군에 투항하면서 북아프리카의 추축국 세력이 [[개발살]]나버리는 것을 끝으로 아프리카 전역은 막을 내린다. 폰 아르님 장군은 롬멜 장군이 인계해 준 [[AEC 지휘장갑차|지휘차량 맘무트]]를 소각해 버리고 항복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